이 디스플레이용 서체엔 대문자밖에 없었으며 형태는 약간 조악했다. 디자인적 측면에서 보면 이
의 가치는 미미했다. 좀 더 흥미로운 디자인은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였는데 1898년 독일 베를린의 베르톨트 활자주조소에서 제작하였다.
less.. 이 서체는 크게 성공하였고 많은 활자주조소에서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많은
산세리프처럼 악치덴츠 그로테스크 또한 디스플레이용으로 고안된 것이었다 (독어로 Akzidenzschrift 는 디스플레이용 모양 또는 임시용 타입이란 뜻이다), 어찌되었건 소문자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텍스트용으로도 사용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의 기본이 뭘까? 출판을 위한 서체는 15세기로 돌아가는데 당시 타입페이스가 모두 세리프체였던 것은 손글씨를 따라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산세리프가 출연했을 때 디자인은 그 당시의 세리프 글씨에 바탕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는 어떤 서체 디자이너가 만든 것이기 보다는 베르톨트사의 무명의 글자 파는 숙련공이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숙련공이 세리프가 없는 형태에 대한 총체적인 아이디어를 활용했을텐데 당시에 유향했던 발바움 Walbaum 이나 디도 Didot 같은 형태에 의존했을 것이다. 이건 발바움과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의 글자를 서로 중첩시켜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고전적 서체는
산세리프 디자인을 위한 좋은 모범은 아니었다. 발바움이 가진 c나 2, 5 같은 곳의 가늘고 긴 꼬리는 우아했지만 이런 점을
산세리프에 적용하면 굉장히 폐쇄적인 모양이 나왔다.
1928년에 폴 레너는 퓨추라를 디자인했다. 처음으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처럼 고전적인 서체형태에 의존하지 않은
산세리프 서체가 탄생했다. 대신 이 형태는 처음부터 새로 만들어졌다. 퓨추라는 바우하우스 운동과 구성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레너는 퓨추라를 고전적인 원리에 의거해 만들었는데 바우하우스 운동보다는 로마 비문의 대문자에 의지했다. 이것이 퓨추라가 성공한 큰 이유인데 균형이 잘 잡혀있는데다가 당시 유행한 바우하우스의 아우라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1957년엔 유니버스 Univers,
헬베티카 Helvetica 그리고 많은 비슷한 서체들이 퓨추라같은 세계대전 이전의 기하학적인 서체의 반향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서체들은 모두 이전의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에 바탕을 두었는데 짧은 기간동안 많은 인기였다. 다른
산세리프에 의거한
산세리프의 디자인은 질이 낮았고 그래서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에 비하면 새로운 면이 없었다.
모두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보다 더 나은 척을 했지만 악치덴츠그로테스크의 매력적인 서투름만 제거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에이드리언 프루티거가 디자인한 유니버스체의 서체디자인은 새로운 큰 특징을 가졌다.
그 특징이란 21개의 무게와 넓이가 완벽하게 조화되도록 과학적인 시스템을 갖추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글처럼 수많은 다양하며 굵기와 넓이가 난무한 불명확한 시스템의
산세리프 서체에 대한 해답이 되었다. 유니버스는 몇 년 전 다시 디자인되어 60개가 넘는 종류로 확장되었는데 너무 자간이 가깝고 벌써 너무 비스듬한 이탈릭체는 더 경사지게 만들었다. 이미 성공적인 서체디자인을 손보는 것은 타입디자이너의 금지 강령에 포함되어야 할지 모른다.
악치덴츠 그로테스크의 이탤릭은 옆으로 누운 로만체에 지나지 않았지만 왜 이탤릭이 진짜 이탤릭에 의거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악치덴츠 그로테스크를 발바움 이탤릭에 빗대어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진짜 이탤릭은 로만체와는 다른 원칙을 가졌다. 아마도 활자주조소간의 큰 경쟁으로 인해 19세기 주조공들은 빠르게 제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았을 것이고 그래서 서로 베끼는 행동을 했을 것이다. 진짜 이탤릭 버전은 너무 만들기가 힘들었거나 큰 수고를 요했을 것이며 기울어진 로만체가 훨씬 더 카피하기가 쉬웠을 것이다. 이상한 사실은, 오늘날에도, 그냥 비스듬한 로만체가
산세리프 이탤릭체의 원형이 된다는 것이다. 뉴스고딕 News Gothic (1908) 이나
헬베티카 Helvetica 는 모두 기울어진 로만모양을 가졌다. 또한 에이드리언 프루티거같은 Adrian Frutiger 많은 디자이너들은 비스듬한 로만 slanted romans 체를
산세리프 디자인에 사용하였는데, 최근에서야 프루티거 Frutiger 1977의 모양이 새로 2000년에 디자인되며 이제 비스듬한 로만이 아니라 이탤릭을 가지게 되었다, 이탤릭이 비스듬한 로만자보다 훨씬 대조가 분명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퓨추라같은 서체는 옆으로 누운 로만자를 가지고 있는데 퓨추라는 세리프서체를 모델로 삼지 않았으므로 수긍할수 있다.
좀 더 재미있는 것은 길산의 이탤릭이다. 길산의 이탤릭은
산세리프 서체중 진짜 이탤릭 모양을 가진 첫 서체중 하나이다. 에릭 길의 첫 이탤릭체 스케치들은 굉장히 캘리그래픽한 특징을 나타낸다. 에릭 길은 돌세김으로 커리어를 시작한 뛰어난 서체디자이너이다. 그는 길산을 1928년에 디자인했는데 무의식적이었을지 몰라도 세리프 모양을 머릿속에서 염두에 두고 디자인한 서체다. 길산과 세리프가 있는 조애나 Joanna 1930 를 섞으면 굉장히 잘 어울린다. 조애나는 길산의 동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에릭 길이 만약 조애나와 길산을 하나의 활자가족으로 디자인했다면 역사상 첫 세리프와
산세리프 자족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에릭길은 그 둘을 다른 이름으로, 다른 디자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세리프와
산세리프를 섞기 내 의견으론, 세리프와
산세리프를 섞는 것은 세리프 서체와
산세리프 서체가 같은 토대를 두고 만들어졌을 때에 한한다, 아니면 같은 뼈대를 두어야 한다. 단순히 세리프 디자인을 가지고 세리프를 떼내고 대비를 줄이면
산세리프가 나온다. 하지만 당연히 이는 그보단 더 복잡한 문제이다. 가장 합리적으로 알맞은 순서는 세리프 디자인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처음으로 세리프에서 출발한
산세리프를 만든 사람은 네덜란드의 얀 반 크림펜 Jan van Krimpen 인데 1930년대 초 그는 세리프가 있는 로물루스 Romulus 를 만들었고 이것은
산세리프를 함께 포함한 디자인이었다. 세리프를
산세리프에 중첩시켜보면 반 크림펜이 어떻게 디자인을 진행했는지 알 수 있다. 로물루스산은 4가지 굵기를 가졌는데 아쉽게 실험적인 시도에 그쳤고 시판되지 않았다.
스칼라Scala와 스칼라 산 Scala sans. 한가지의 원리에서 탄생한 두 가지의 서체
나는 스칼라를 1987년에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우트레흐트 브렌덴베르크 음악센터에서 두 명의 그래픽 디자이너 중 한명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네덜란드에서 다른 음악당보다 훨씬 많은 음악회를 치루는 곳이었다. 우리는 애플 맥킨토시의 첫 모델로 페이지메이커 1.0을 사용해 작업했는데 16개의 서체를 고를 수 있었다. 나는 소문자숫자(올드스타일 숫자라 부르는), 이 환경에선 내가 사용하도록 교육받은 대소문자, 리가쳐를 16 포스트스크립트 폰트에서는 사용할 수가 없었다. 콘서트 홀 프로그램, 브로셔, 포스터는 모두 다른 정보를 포함했는데 작곡자, 제목, 지휘자, 오케스트라, 솔로이스트, 시간, 날짜, 장소같은 것 말이다. 이런 정보를 디자인하려면 그런 소문자 숫자와 대소문자, 리가쳐가 필요했다. 그래서 브렌덴베르크를 위한 서체를 밀라노의 테아트로 알라 스칼라를 따라 네이밍 하기로 했다.
스칼라의 형태에 관한 법칙은 벰보 Bembo나 18세기 프랑스 타이포그래퍼였던 피에르 시몽 푸르니에 Pierre Simon Fournier같은 휴머니스트 서체의 영향을 받았다. 하지만 나는 스칼라의 대비가 약하길 바랐고 또 세리프가 강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왜냐면 보통의 포스트스크립트 폰트들이 너무 가늘었기 때문이다. 이탤릭은 16세기의 이탈리아 서예가인 아리기 Arrighi 같은 것에 더 많은 바탕을 두었다 하지만 만은 디테일은 로만에 크게 연관되어 있다. 스칼라산은 스칼라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생김새는 '휴머니스틱' 했다.
그때까지
산세리프엔 이런 모양이 드물었는데 크게 꼽을 수 있는 예외는 길산과 신택스Syntax (1968, Hans Eduard Meier) 이다. 신택스 로만은
산세리프 로만 중 가장 아름다운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신택스 이탤릭은 눕혀진 로만자이다.
아마 마이어가
산세리프에 대한 기존의 틀을 벗어나기엔 너무 일렀던 듯 싶다. 스칼라의 디자인 방향성은 나에게 분명했다. 나는 소문자 숫자가 보통 폰트에 포함되길 바랬고 올드스타일 (osf) 폰트에 포함되길 바라지 않았다. 나는 또 소문자 숫자를
산세리프를 위해 디자인하고 싶었는데 그때까지
산세리프에는 소문자숫자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에릭 길도 길산에 소문자숫자를 포함하지 않았다. (하지만 1990년도에 모노타입사에서 포합시켰다). 이상하게도 폴 레너가 올드스타일 숫자를 만든 단 한명으로, 퓨추라에 소문자숫자를 디자인했는데 별로 사용되지 않았다.
스칼라산 이탤릭은 세리프 스칼라를 거의 따른다. 이탤릭 대소문자, 리가쳐, 소문자 숫자는 스칼라를
산세리프, 세리프, 그리고 로만과 이탤릭에 이 모든 게 포함된 유일한 활자가족을 만든다.
스칼라와 스칼라산을 디자인하며 세리프와
산세리프를 만들며 내 아이디어를 마음껏 펼쳤다. 내 모트는 '하나의 원칙에서 두 가지 서체' 가 되었는데 로만과 이탤릭이 분리되면 나타난다.
나는 서체회사에서 일하지 않았고, 뮤직센터는 나를 믿었으며 시간제한의 압박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세리프와
산세리프에 관해 마음껏 생각할 수 있었다. 많은 기존의 아이디어들은 맞지 않아보였으며 나는 그런 것들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스칼라는 1990년에 폰트샵 인터내셔널에서 텍스트 서체로 발매되었으며 삼 년 후 스칼라산이 나오며 활자가족은 굉장히 인기 있게 되었다. 세리프 서체에 맞는
산세리프를 사용하는 것은 전 세계 그래픽디자이너에게 행복한 일이었다.
펠레폰트, 내 중간적인 산세리프
1993년에 나는 텔레폰트 리스트와 펠레폰트 텍스트를 네덜란드의 전화번호부를 위해 디자인했다. 이 타입페이스는
산세리프를 만들 것을 염두에 두었다. 여기선 스칼라를 디자인 할 때의 경험을 살릴 수도 있었지만 세리프 서체를
산세리프의 원형으로 삼은 것이 아니었다. 하여튼 스칼라산을 디자인할 때보다 훨씬 제약이 많았다. 텔레폰트 리스트 (처음에 제작한)은 작은 사이즈로 값싼 종이에 인쇄될 것이었고 공간을 많이 절약해야 했으며 PTT(Post, Telefonie, Telegrafie) 가 기존에 사용하던 유니버스 Univers 체보다 이독성이 좋아야 했다. 게다가 전화번호부의 타이포그래피적인 리디자인도 고려해야 했다. 서체를 4개의 컬럼 그리드에 맞추어 정교하게 교정해야 했으므로 좋은 기회였고 또 서체를 바꾼 후에 레이아웃을 바꿀수도 있었다. 거의 인터랙티브 디자인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하여간 북디자이너의 경험이 잘 활용된 경우였다.
텔레폰트 리스트는 정말 활용하기 좋은 서체인데 전화번호부 리스트에 자동으로 사용될 수 있고 텔레폰트 텍스트는 커스텀 디자인된 소개 페이지 텍스트 용으로, 대소문자나 올드스타일 숫자들을 사용한 좀 더 정교한 타이포그래픽 조정이 가능토록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가장 많이 사용된 서체는 가장 적은 가능성을 가졌고 가장 적게 사용된 서체는 가장 많은 가능성을 가졌다. '텔레폰트 리스트와 텔레폰트는 1994년부터 네덜란드 전화번호부에만 사용되고 있는데 앞으로 공개 될 듯 하다. 하여튼 나는 텔레폰트 세리프를 만들 생각은 없고
산세리프를 바탕으로 세리프체를 만드는 것이 좋은 생각이라 여기지 않는다.
세리아와 세리아산, 문학적인 서체
나는 세리아의 첫 스케치를 1996년에 베를린에서 바르샤바로 가는 기차 식당칸의 냅킨 위에 시작했다.
새로운 서체 디자인을 할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 째는 스칼라에 불만인 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디자이너로써 스칼라는 좀 더 문학적인 시와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없었고 어센더와 디센더가 짧아서 고집스러워 보이는 데가 있다고 생각했다. 스칼라를 긴 어센더와 디센더를 가진 버전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 밖에도 고치고 싶은 디테일들이 많았다. 스칼라는 스칼라라는 결정을 내리고 결점을 고치기 위해 결국엔 새로운 서체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 새로운 서체는 긴 어센더와 디센더를 가지게 될 것이란 생각이었다. (가장 경제적이거나 공간을 절약하는 서체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었다).
두 번째 이유는 프랑스의 미술비평가인 엑토르 오발크 Hecotr Obalk의 질문에서 유래한다. 1996년에 그는 내게 파리의 퐁피두 센터에서 서체디자인에 대한 강의를 해줄것을 부탁했다. 강연 후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는 스칼라를 너무 좋아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사실 그는 그 서체를 너무 좋아해서 그가 쓰고 있는 책에 스칼라를 사용하고 싶어 했는데 마르셀 뒤샹의 글, 라디오 토크, 인터뷰 같은 것을 담을 것이라 했다. 하지만 그는 뒤샹의 복잡한 텍스트를 위해 특별한 서체가 필요했다, 굉장히 비스듬한 이탤릭 같은것 말이다. 그는 이런 것을 스칼라를 위해 만드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서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곧추선 이탤릭이 세리아의 특징이 되었는데 '평범한' 이탤릭 (내가 세리아 커시브 Seria Cursive라고 부르는) 은 뒤에 발표한 세리아의 버전에 포함되었다. 세리아는 2000년에 폰트샵 인터내셔널을 통해 발표되었는데 뒤샹에 관한 책에 사용되기엔 너무 늦었으나 오발크 덕분에 이탤릭과 커시브가 둘 다 포함되어 있는 타입페이스를 디자인하게 되었다.
세리아의 각 글자는 크게 확대해보아야 알아볼 수 있는 미묘한 디테일과 인습에 얽매이지 않은 곡선을 가지고 있다.
작은 사이즈로 보면 이런 디테일을 눈치 채기 어렵지만 '느낄 수' 있다. 뚜렷한 곡선들이 세리아를 '고의적으로 불규칙적'이게 보이도록 하는데 미국 타입디자이너인W.A.Dwiggins와 내 네덜란드 동료인 브람 드 도스 Bram de Does 가 따르는 원칙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의 불규칙성이 가독성을 높여준다는 믿음에서 유래한다.
세리아를
산세리프 버전으로 확장하려는 결심은 확고했다. 까만 마커와 하얀 페인트로 세리프 캐릭터를
산세리프로 바꾸었다. 세리아 산은 같은 긴 어센더와 디센더를 세리프 세리아처럼 가졌는데
산세리프로썬 드문 일이다. 세리아산의 강점은 이탤릭에서 볼드 이탤릭이 나오는 것처럼 굉장히 인과적이란 점이다.
현대적인 산세리프
과거의
산세리프 디자인은
산세리프의 모양에 대한 인식적인 고려가 없이 만들어졌다. 이런 디자인은 서로의 디자인을 베낄 뿐이며 서체 디자이너는 자신이 디자인한 서체의 모양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1980년대까지 세리프/
산세리프 가족이 나타나지 않았다. 세리프 서체는 긴 전통을 가졌지만
산세리프는 현대적이다. 두 가지를 갖춘 서체 몇 가지를 열거해보면: 루시다 Lucida (Kris Holmes and Charles Bigelow, 1984-1985), 스톤 Stone (Sumner Stone, 1987), 로티스 Rotis (Otl Aicher, 1989), 샬롯 Charlotte (Michael Gills, 1992), 리거시 Legacy (Ronald Arnholm, 1993), 콰드랏 Quadraat (Fred Smeijers, 1992-1996), 티시스 Thesis (Lucas de Groot, 1994), 유레카Eureka (Peter Bilak, 1995-2000) 등이 있다.
지난 15년 간
산세리프 디자인은 혁명적이었다. 더 많은 디자이너들이
산세리프의 유래에 대해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세리프체와 파트너가 될 수 있는
산세리프를 디자인하고 있다. 내 타입디자인 철학을 요약하자면 '악수하고 조화롭게 Shake hands and work together in harmony' 이다 .
First published in tipoGrafica, No 53, Buenos Aires, Argentina, 20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