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1170612
땅콩버터는 두 종류가 있다. 크리미/크런치. 크런치는 땅콩이 우득우득 씹히고 크리미는 버터와 같다. 땅콩을 으깨고 으깰수록 농도짙은 크림이 되고 생크림은 휘저을수록 단단해져 결국 수분과 분리되고 버터가 된다. 어릴적엔 부드러운 땅콩버터가 좋았는데 크니까 크런치한 땅콩버터가 더 좋은것 같다. 몇주간 물렁한 땅콩버터와 같은 상태였다. 버터와 같은 상태였는지도 젤리같은 상태였는지. 마요네즈인지 고추장인지 된장인지 크림치즈인지. 단단한 땅콩이 버터가 되고, 액체였던 크림이 버터가 되는것처럼 몸에 들어온 바이러스는 사람을 원심분리기처럼 뒤흔들어서 다른상태로 만들어낸다. 몸이 괴롭기도 했지만 뭔가 반가사상태에 있었던것처럼 몽롱해서 마음에 들기도했다. 100%는 아니지만 이제 거의 다 나아서 갑자기 익숙해진 상태에서 빠져나가려니 마음이 약간 아쉬워하고있다.
저번주에 계속 일을 못나가고 누워 쉬었다. 이것저것 엄청 밀려서 부담이 쿵쿵 쌓인다. 해야할것의 목록을 쓴 후 리스트 맨 위에 있던 편지번역을 하나 했다. 나머지 것들은 시간이 많이 걸릴것이다. 아빠는 수요일에 가신다. 그때까지 오랫만에 가족이 단란하게, 아무 걱정없이,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까지만. 내 걱정들이 갑자기 비집고 들어오면서 환상이 깨져버린다. 모두 행복해...라고 내맘대로 생각하는 동안 각 가족의 머릿속에 각자의 근심이 카라마조프의 사람들만큼은 아니더라도 제각각의 속도로 돌아가는게 보인다. 각자의 머릿속에 근심의 모터, 행복의 모터가 기어를 바꿔가며 돌아간다.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모터는 쉬면서 사람은 땅콩버터가 되버리는거다.
조금아까 보던 책에서 참 마음에 드는 대목이 있었다.
'어두컴컴한 방에서 텔레비전을 보았던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공간에서 화면을 통해 나오는 광경만큼이나 그 화면이 만들어내는 모한 빛의 변화는 새로운 공간 경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것은 텔레비전을 더 이상 텔레비전이 아닌 '소리나는 조명기구'로 호명할수 있는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참 좋다. 이 대목이랑 책의 글 옆 그림으로 책 한권이 다 요약될수 있다. 난 잡다한걸 번역할때던, 내가 뭔가를 써야할때던, 그림을 그릴때던 또 디자인을 해야할때던, 항상 80프로의 느낌이 든다. 이것들은 제각각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것들이라서 느낌, 생각, 글, 이미지, 이런것들을 손에 잡히지 않는 추상적인 세계에서 물질적인 모양으로, 손으로 들어 레고를 쌓아올리듯 착착 수월하게 옮겼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알수없는 에너지같은것들, 다루기가 힘들고 모래마냥 손가락사이로 빠져나가버린다. 블록처럼 쌓아올려보면 내가 처음에 본것이랑 왠지 색깔도 몇개 틀리고 갯수도 틀린것이다...챈스의 묘미라는것도 있지만 사람은 심상을 그대로 카피해보고싶은 불가능한걸 그리워한다. 그런마음에 인간세계의 첫번째 그림이 그려진게 아닐까.
Ʈ ּ :
http://pooroni.com/zz/rserver.php?mode=tb&sl=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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