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2161242




오늘(어제) 기분이 나쁜 일들이 많이 있었나보다. 집에 와서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학자금 융자신청한것도 탈락하고 고대하던 논문을 찾아 읽었더니 실망스러워서 내가 주제를 잘못 고른것인지 정말 고민스럽고, 학교갔더니 일벼락만 옴팡 맞고 논문날짜는 40일 남짓 남고 더더더더 많이 있었는데, 그래서 위에 그림도 만들었다. 참 어제 잠을 안자서 더 기분이 나빴구나. 오늘밤도 내일 일이 밀려버려서 안자게됬는데 막상 집에 와서 일을 하려니까 컴푸터가 갑자기 미쳐버렸다. 혼자 꺼졌다 켜지기를 몇시간... 왜이러는 것일까. 당황하다보니 새벽 다섯시가 되었다. 인제 기분나빴던 것들이 다 우습다.

<의상의 선택에 대하여 Du choix d'un vetement

로자 룩셈부르크에 대한 한 TV 영화가 그녀 얼굴의 아름다움을 나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녀의 눈 때문에 나는 그녀가 쓴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을 느낀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하나의 허구를 생각하게 된다. 어떤 지식인이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려고 결심하고, 자기 식의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는 허구. 어떠한 마르크스주의가 좋은가? 그 주조색은? 그 상표는? 레닌, 트로츠키, 룩셈부르크, 바쿠닌, 마오쩌둥, 보르디가 등? 여러 가지 의상을 손으로 만져보는 것같이 이 주인공은 도서관에서 모든 책을 읽고 자기에게 가장 적합한 마르크스주의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때부터 자기 육체의 경제 체제에 다름아닌 하나의 경제 기준에 입각하여 진리에 관한 담론을 행할 준비를 하고 있다. >

같은 것때문에 우울해질때가 있다. 얼마나?

전공도, 논문주제도, 성실함도, 진실함도, 의견도, 취향도 그리고 우울증까지도 모두 저런식이다. 그러니까 싫으면 벗고 다시 입으면 된다. 그러니까 오늘 기분나쁜것도 멍하게 컴퓨터가 왜저러나 기다리는 동안 옷이 없어졌다?. 그러기 때문에 항상 진지할수가 없고 그렇기 때문에 진지해야한다. 옷은 입고 다녀야하니까.

컴퓨터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동안 하이브리드 세상읽기를 읽어봤다. 이 책 재미있다. 그런데 표지가 펄지인게 약간(얼마나?) 마음에 안드는것 같았다. 마음에 안드는것인지, 마음에 걸리는것인지 그냥, '펄지' 하는 단어가 울리고 쯧쯧 하는 감정이 드는것이다. 왜지? 잘 모르겠다. 펄지에 인쇄하면 잉크가 잘 벗겨지고 채도가 가라앉는다. 그러면서 반짝반짝거린다. 흔하지 않다면 novelty로 보일수도 있지만 많기 때문에 vulgar 한 가치와 연관이 된다 이 vulgar 한점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다. 보편적으로 볼때, 회화는 high art 이니까 vulgar 한 키치나 버내큘러를 high의 탁월한 우월의 표시로 수용한다. 디자인은 low art (이 캐터고리에 포함된다면) , high art 쪽으로 가까워지고 싶어하는 속내를 가졌다. 그렇기 때문에 vulgar 한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고 모더니즘적인 사상을 가볍게 이중적으로 계속 유지한다. 태생이 기능주의적인것에 기인하는 것이지만 또 그것의 배타적인 가치때문이기도 하다. 디자인이 키치와 버내큘러를 수용할땐 그게 회화에서 이미 용인된 다음이다. 회화가 로우 아트를 수용할때는 그게 이미 존재했지만, 로우 아트가 하이 아트로 흡수되었을때만 하이 디자인이 로우 디자인을 수용한다. 그냥 두 분야의 위치선점의 문제고 내가 계속 그림을 그렸으면 펄지를 보았을때 긍정적인 느낌이 들었을것이고, 언어와 사고체계에서 디자인과 회화가 그런식으로 이분화되지 않았다면 펄지를 보았을때 별 느낌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렇게 나뉘는게 횡포한 느낌이 들어서 싫다. 나는 그냥 시각적인 자극이 좋고 이것저것 보는게 좋고 보이는 이것저것들의 관계가 좋은데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배후에 뭐가 깔렸는지 잠깐씩 생각하고 나면 그냥 보이는게 다 짜증나게 생겨보이는 것이다. 우리 강아지까지. (여기서 멈추면 preference 가 되겠다)

여러가지 것들을 좋아하고 싶다. 정말 많이많이 좋아하고 싶다. 그건 그냥 퇴행하고 싶은 마음일까? 어릴때는 취향 preference 의 단계에 머무는데 어리지 않을때는 preference->evaluation 의 한 단계가 더 생긴다. evaluation 은 사물을 쪼개고 보편화시키고 가치를 부여하고 코드화를 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조각/단편->취향들이 관계의 맥락에 있게된다. '나는 니가 좋아' 가 될 수 없고 '나는 니가 좋아 왜냐면 너는 내 말을 잘 들을것이기 때문이야 그렇다면 부담없이 ...' 그렇게 되버린다. 맥락성 안에선 무엇을 좋아하는것이 힘든 일이 된다. 재보고 비교하고 평가하는 코드가 생겨버렸기 때문이고 그 코드안에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코드를 잘 습득하지 않은것이 될 수 있다. '평가' 없는 취향만의 시퀀스는 감각적인 것이고 감각은 사고에 반하는 단층적인, 인식에 이르지 못하는 차원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앗 컴퓨터가 안꺼지네 빨리 일해야겠다 (라고라고라고 화가들이 말할지 모르지만 하지만 화가들은 디자인과의 구분이 없어진다면 파업하고 딴 직종으로 옮겨가고 싶을껄...화가들은 말하는걸 좋아한다. 그래서 그림을 그린다. 돈 대신 자존심. 어쩔땐 돈 그리고 자존심/영광/ 고호나 쉴레나 또 누가 있을까 클림트같은걸 좋아하는 사람들은 왜그럴까? 물론 저 사람들은 거장들이지만 저사람들을 편애하는건 나쁜취향에 속하는 건데? 코드의 분모가 같지 않아서이겠다. 망할 코드때문에 나는 쉴레가 좋아도 암말 안할 것이고 사고가 코드화되서 쉴레가 좋아보이지도 않는다. 결국 객관성이라는게 있다면 투명한 감각의 판단에 의지할텐데 코드는 자의적이고 코드가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기때문에 불가능하다. 그런 그물같은 코드들, 없애버리고싶다 에잇. 내 취향같은건 정말 재수없다. 가끔씩 정말 몰취미의 사람을 보면 존경스럽다. 왜 난 그냥 그렇게 될 수 없을까. 내 취향이란 틀이 너무 싫고 나를 구속하는데 여기서 나갈수가 없다. 취향도, 취미도 정말 의미없다. 디자인에서 취향과 스타일을 떼놓을수 없다. 그래서 그냥 저냥 가끔씩 우울한가보다. 하지만 이것은 그냥 직업이다, 먹고살기 위한 흥미로운 영역의 일부이다 이다 이다.


pooroni @ 05/02/16 00:42 | Permalink | →note - daily | Trackbacks | (3) Comments

Ʈ ּ :
http://pooroni.com/zz/rserver.php?mode=tb&sl=144

Comments
너무 우울할때는 잠도 안오죠..^^;

그래도 다음날 되면 씩씩하게~
아크몬드Բ 05/02/17 17:26 ۼ.

코드란게 암호를 얘기할때도 코드라고 말하죠 암호화라는게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키기 위한게 아니라 좀더 구체적이고 안전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방식중에 하나라고 하니 문화적 코드도 좀더 세분화된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방편중에 하나가 아닐까 하는....
zuncԲ 05/02/17 22:56 ۼ.

아크몬드// 맞아요 잠이 안오는것 같지만 다음날 보면 자다 일어나드라구요 ^^
zunc// 맞어요 문화코드(=소통을위한규약)도 세분화된 커뮤니케이션 방편이겠죠. 그런데 저처럼 둔한사람은 암묵적인 코드를 잘 읽지못해서 난감한 상황에 처하기두 하구요^^ 코드에 맘에들지 않는 정치성이 너무 느껴질땐 짜증이 나기도 하는것 같아요...그치만 코드가 없으면 얼마나 불편할까...코드에도 장단점이 있나보네요^^
pooroniԲ 05/02/19 02:48 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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