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를 듣다보니 너무 많이 걸어가서 알 수 없는 곳에 가버렸다. 그냥 평범한 길가인줄 알았는데 이상한 사원이 있었다. 궁금해서 꼰지발로 돌담 넘어 들여다보니 안이 적막했다. 표지판엔 ‘김세필의 묘역’ 이라고 써있었고 김세필은 사림파로, 사화를 겪어 유배된 적이 있는 이조참판을 지낸 경주김씨라고 했다. 묘역으로 올라가도록 돌계단이 있었는데 각 계단 사이마다 제비꽃이 한 다발씩 펴있었다. 위로 올라가보니 가장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김세필의 어머니의 묘부터 시작해서 여러 무덤들이 둥글둥글 솟아있었는데 지대가 완만하고 둥글둥글하게 경사져서 누런 잔디, 파릇해지는 다른 풀들, 제비꽃과 섞인 오래된 이불 같았다. 땅이 굉장히 푹신푹신해서 기분 좋을 것 같아 구르고 싶게 생겼다. 여러 분들이 땅 밑에 계시다는 생각을 하니 엄숙한 기분이 들었는데 곡선의 땅과 대비되는 위압적으로 세로로 서있는 묘비나 상들을 보니 마님이 일어나셔서 호통 치실 것 같았다.
돌에 글자를 판 묘비엔 노란색이랑 주황색 작은 버섯들이 펴있어서 색이 묘했다. 내려오면서 제비꽃 하나를 꺾었는데 들고 보니 꽃 안쪽에 하얀 수염이 나 있는 것이 사람 얼굴 같기아서, 몇 차례 사슬을 걸쳐서 땅 밑 분들 몸이 꽃에 들었겠네, 생각하는데, 저 밑에서 오던 할아버지가 ‘경주김씨요?’ 물으셨다. 무덤들이 가족들이랑 나무들이랑 꽃들이랑 함께 있으니 그리 을씨년스럽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몰래 혼자 가서 누워있다 오는 구릉이 있었는데, 조용하고 언덕 밑에선 간혹 당나귀 우는 소리만 들리고 봄이 되면 에델바이스처럼 하얀 꽃들이 피는 멋진 곳이었다. 누워서 구름이 형태를 바꾸는 것만 봐도 시간가는 줄 몰랐고 나도 거기에 사는 생물 중 하난 것 같아서 기분이 편해지는 장소였다. 묘역 꼭대기서 보니 내려다보이는 아파트 살색 떼거지가 금방 쳐들어올 것 같았다.
돌아오면서 큰 다리랑 구조물 같은걸 지나쳐왔는데 오래전에 읽었던 프리드의 ‘Art and Objecthood'가 생각났다. 글의 전체 내용보다는 그 글에 있던 Specific Object 의 알레고리격인 New Jersey Turnpike가 생각난다. 토니 스미스가 한밤중에 운전을 하다 뉴저지 턴파이크 공사현장을 지나면서 그 구조물을 통해 미술이 캔버스에 머물 것이 아니라 다차원적 경험을 제공하는 ’objecthood'를 지향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었다는 것이다. 그 해 가을에 알렉스와 턴파이크 이야기를 진짜 많이 했던 것 같다. 은연중에 내가 큰 영향을 받은 글이었는데 까맣게 잊고 살았다. 저번 주에 발표 때문에 내 아카이브를 정리하면서 내가 과거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정리하려 했지만 이미 흩어져버린 생각들을 다시 재생하는게 어려웠다. 하지만 오늘 생각해보니 2000년엔 도널드 저드같은 사람들이 정말로 지향했던 것은 저런 묘역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미니멀리스트들의 manifestation은 좋았지만 execution 방식이 미니멀할 필요가 없었단 생각이었는데 참, 나는 어떤 다른 방식을 통해서 그게 실현 가능하다고 믿고 있었다. mad scientist 처럼 내 theory의 실현가능성에 의심이 없어서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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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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