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08170130
오늘은 밀린 책들을 도서관에 다 반납하고 새로운 책들을 빌렸다. 책이 일곱 권이나 되고 노트북도 든 가방이 아주 무거웠는데 공부할 책들이라기보다 재미있는 책들이어서 고생스럽다기보단 기분이 좋았다. 어두운 대학원 생활 중 도서관에 마음대로 들락거릴 수 있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가방이 등산가방처럼 커서 고통스럽게 많이 걷는 것이 어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십자가라고 생각한건 아니다. 그래서 학교 정문에서 지하철 역까지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길은 언덕이다가 내리막이 진다. 가는 길의 반 정도는 옆이 숲이라서 집에 간다 보다는 걷다 보면 여름 밤 꿈 속에 나오는 숲이 나올 것 같다. 결국 숲의 끝엔 주유소가 나오지만. 곧은 길을 가다 보니 왼쪽엔 도로가 나있고 차들이 쌩쌩 달렸다. 내 오른쪽엔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자라(고)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는 그 사이에 있는 빨간 자전거도로 위를 걷고 있었는데 내가 빨리 가는 차들과 가만히 있는 나무들 중간에서 중간속도로 움직이고 있어서 내가 자동차와 나무의 전령사인양 으쓱한 마음이 들었다. 자동차들에서나 나무들에서나 강한 기가 뻗어나오지만 내가 걷는 빨간 길만 참 평화롭다. 오늘 빌린 책을 하나 꺼내서 오른손으로 눈 높이에 들고 한 손은 뒷짐을 지고 읽기 시작했다. 막 낭독을 하고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옆에 자꾸 등산가시는 아줌마라든가 여러 사람들이 지나가서 괜히 창피해서 속으로만 낭독해보았다. 앞을 보지 않다 가끔 나뭇가지에 부딪힐 때도 혼자 챙피한 마음이 조금 든다. 남자라면 바보한량같겠지만 여자는 뭐라고 불러야할지. 하지만 어느새 지하철역에 도착해있다. 이 길에선 나무들이랑 함께 항상 격양된 마음으로 책을 읽기 때문에 이 길에서 읽은 대목들은 나무에 새겨지듯 뇌리에 남는다.
나무들 옆을 지나면 항상 낯익은 느낌이 들지만 특별한 몇몇 나무들을 빼고는 개별적으로 기억하기가 힘들어서 다 비슷비슷하다. 형태도 제각각 너무 복잡하고 게슈탈트적으로 그룹지어 보려면 기억 속에선 이 나무와 저 나무는 비슷비슷하게 되어버린다. 버드나무와 소나무가 다르지만 버드나무끼리는 또 구별하기가 힘들기도 하다. 아무튼 나에게 시각적으로 경제적이지 않은 형태다. 하지만 버드나무에 민감해야 하는 존재라면 나무와 나무를 잘 구분해서 각 나무가 사람으로 치면 엄마 같고 아빠 같고 선생님 같은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외국사람이 보면 한국사람도 나무처럼 다 비슷하게 보인다니까, 내 눈은 주어진 사회적 문화적 생존적 필요에 한정하여 필요한 것만 봐버린다. 하지만 이렇게 주어지는 시야를 확장하고 또 다르게 볼 수 있는 시각을 길러 주는게 미술교육이라고 한다. 발전된 시야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고 왜 활용해야 하는지 모색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사람과 미술교육을 받은 사람을 비교 했을 때 어떤 차이가 있을까. 미술하는 사람은 배운 것을 자력으로 uneducate 하는 퇴행의 수순을 밟아야 하는 법이다, 배우기 이전의 눈으로 보기 위해서라 한다. 어짜피 늙으면 다시 아이가 된다는데, 사람들은 여러모로 남보다 빨리 나이를 먹을려그러고 먹어버린것을 뱉어내느라 평생 고생하는것 같다. 귀뚜라미소리. 가을이 벌써 창밖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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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저 이미지 익숙하다,ㅋㅋ
mjԲ 05/08/17 12:30 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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